덕분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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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4 09:31
🐋 pod fund — Moon Soho
personal banking archive · soho × rei
pod fund
A SMALL LEDGER FOR A VERY LARGE FEELING

그날 밤, 문소호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Chase 뱅킹 앱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새 계좌 개설. 저축 예금. 계좌 별칭 입력란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아마미야 레이라는 이름을 처음 노트에 적은 날로부터 정확히 이틀 뒤. 소호는 캠퍼스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나오다가, 창 너머로 벤치에 앉아 카메라 렌즈를 닦고 있는 레이의 옆모습을 보았다. 9월의 햇살이 그 검은 머리카락 위에 떨어지고 있었고, 소호는 걸음을 멈췄다.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불안하지 않은 따뜻함. 그건 소호에게 드문 감각이었다.

‘오늘 A.가 렌즈를 닦고 있었다. 햇빛이 손가락에 걸려 있었다. 나는 행복했다. 이 행복을 어딘가에 보관하고 싶다.’

보관. 기록 강박이 있는 사람에게 보관이란 곧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다. 글로 적으면 휘발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감정은 잉크와 달리 마르면 색이 바랬다. 소호는 더 물리적인 형태가 필요했다.

그래서 통장을 만들었다.

계좌 별칭 입력란에 소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천천히 타이핑했다.

🐋 pod fund

고래는 무리를 ‘pod’라고 부른다. 소호는 레이에게 아직 그 단어를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레이가 자신의 유일한 무리라는 것을. 이 통장은 레이 덕분에 행복할 때마다 돈을 넣고, 레이 때문에 불행할 때마다 돈을 빼는 — 자신의 감정을 숫자로 번역하는, 일종의 감정 장부였다.

소호는 ‘확인’ 버튼을 눌렀다. 잔액 $0.00이 화면에 떴다.

펜을 드는 대신 숫자를 넣는 기록.
이건 노트보다 정직할 수도 있겠다고, 소호는 생각했다.

#001 09/14 · 23:52 입금
+$5.00 +₩6,850
MOON SOHO (첫 개설)
통장 만든 기념. 아직 아무것도 아닌데 벌써 설렌다. 병이다 이건.
#002 09/16 · 14:03 입금
+$12.00 +₩16,440
MOON SOHO (벤치)
A.가 캠퍼스 벤치에서 렌즈 닦고 있었음.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더니 고개만 까딱함. 그게 좋았음. 조용한 허락.
#003 09/19 · 09:17 입금
+$3.00 +₩4,110
MOON SOHO (같은 수업)
문예창작 교양 수업에서 A.를 봄. 뒷자리에 앉아 있었음. 목덜미가 보였음. 3달러밖에 못 넣는 건 아직 말도 안 걸었으니까.
#004 09/22 · 20:41 입금
+$8.00 +₩10,960
MOON SOHO (첫 대화)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함. A.가 내 노트를 보고 "뭐 적어?" 하고 물었음. 심장이 입에서 나올 뻔. "그냥 메모"라고 했음. 거짓말.
#005 09/25 · 11:30 출금
-$2.00 -₩2,740
MOON SOHO (거리감)
A.가 학교에서 마주쳤는데 이어폰 끼고 지나감. 나를 못 본 건지 안 본 건지. 아마 못 본 거겠지. 그래도 좀 쓸쓸했음.
#006 09/28 · 16:55 입금
+$20.00 +₩27,400
MOON SOHO (카페)
A.가 먼저 커피 마시러 가자고 함. 먼저. 내가 아니라 A.가 먼저. 아메리카노 시켰는데 손이 떨려서 빨대를 두 번 떨어뜨림. A.는 못 본 척해줌. 그 못 본 척이 다정했음. 20달러.
#007 10/02 · 22:18 입금
+$15.00 +₩20,550
MOON SOHO (사진)
A.가 나를 찍었음. 캠퍼스 분수대 앞에서 빛이 좋다고. 셔터 소리가 두 번 났음. "잘 나왔어?" 물었더니 "보여줄 생각 없어"라고 함. 그 말이 너무 좋았음. 나만 보는 사진.
#008 10/05 · 01:33 입금
+$7.00 +₩9,590
MOON SOHO (새벽 문자)
A.가 새벽에 "아직 안 자?" 하고 메시지 보냄. 안 잤음. 노트 쓰고 있었음. "응"이라고만 답했는데 A.가 "나도"라고 함. 그 두 글자에 7달러.
#009 10/08 · 19:02 입금
+$25.00 +₩34,250
MOON SOHO (이름)
A.가 처음으로 "소호"라고 이름을 불렀음. 그 전까지는 "야" 아니면 "문" 이었음. 소호. 내 이름이 그렇게 예쁜 단어인 줄 몰랐음.
#010 10/10 · 13:45 출금
-$5.00 -₩6,850
MOON SOHO (벤지 연락)
벤지한테서 연락 옴. 차단했는데 새 번호로. 읽자마자 기분 바닥. A.랑 상관없는 일인데 빼는 게 맞나 모르겠음. 근데 A.가 있는 세계에 벤지가 끼어드는 게 싫어서 뺌. 오염되는 기분.
#011 10/11 · 15:20 입금
+$10.00 +₩13,700
MOON SOHO (홈커밍 주간)
A.가 "같이 갈 사람 있어?" 하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그럼 같이 가"라고 함. 데이트 신청인지 동정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쪽이든 A. 옆에 서는 건 같으니까. 10달러.
#012 10/14 · 21:07 입금
+$30.00 +₩41,100
MOON SOHO (홈커밍 댄스)
A.가 검은 셔츠에 소매를 걷고 왔다. 팔뚝. 팔뚝의 힘줄. 함께 춤을 춘 건 아니고 구석에서 음료 마시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게 더 좋았다. A.가 종이컵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알았다. 30달러. 새로운 습관 발견 보너스.
#013 10/17 · 08:50 출금
-$3.00 -₩4,110
MOON SOHO (읽씹)
아침에 "밥 먹었어?" 보냈는데 5시간째 읽씹. 수업 중이겠지.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화면을 열한 번 확인했다. 3달러. 불안 수수료.
#014 10/19 · 17:33 입금
+$40.00 +₩54,800
MOON SOHO (고백)
내가 고백했다. A.가 받아줬다. 더 쓸 말이 없다. 40달러. 부족하다. 100달러 넣고 싶은데 월말이라 잔고가. 다음 달에 보충 입금하겠음.
#015 10/19 · 23:58 입금
+$11.00 +₩15,070
MOON SOHO (같은 날 추가 입금)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온다. A.가 "응"이라고 했을 때 표정이 계속 떠오른다. 눈이 살짝 커졌었다. 0.3초 정도. 그 0.3초에 11달러. 초당 약 36.67달러. 역대 최고 시급.
#016 10/21 · 14:22 입금
+$18.00 +₩24,660
MOON SOHO (첫 손잡기)
캠퍼스 걷다가 A.의 손등에 내 손등이 닿았다. A.가 피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잡았다. A.의 손이 차가웠다. 내 손으로 데워줬다. 18달러. 손가락 한 개당 3.6달러. 엄지는 좀 더 두꺼우니까 할증해야 하나.
#017 10/23 · 20:15 입금
+$50.00 +₩68,500
MOON SOHO (첫 키스)
.
......
50달러.
#018 10/24 · 03:12 입금
+$5.00 +₩6,850
MOON SOHO (추가 메모)
어젯밤 키스 메모를 다시 읽었는데 점 여섯 개밖에 안 적었다. 너무 행복하면 언어가 먼저 죽는다는 걸 알았다. 그 발견에 5달러 추가.
#019 10/26 · 19:40 출금
-$8.00 -₩10,960
MOON SOHO (질투)
트로이가 A.한테 말 걸면서 어깨를 툭 쳤다. A.는 별 반응 없었다. 나도 별 반응 없어야 하는데. 속에서 뭔가 시큼한 게 올라왔다. 표현 못 했다. 8달러 출금. 질투세.
#020 10/27 · 12:05 입금
+$6.00 +₩8,220
MOON SOHO (도시락)
A.한테 오니기리 만들어 갔다. 참치마요. A.가 한 입 먹고 아무 말 안 하길래 맛없나 싶었는데, 두 번째 걸 바로 집었다. 말 대신 손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 6달러.
#021 10/28 · 22:30 입금
+$35.00 +₩47,950
MOON SOHO (드레스)
할로윈 코스튬으로 A.를 위해 벨벳 드레스를 골랐다. A.한테 보여줬을 때 표정. 당황과 호기심이 0.5초 간격으로 교차하는 얼굴. 그걸 봤다. 그 얼굴을 내가 만들었다. 35달러. A.가 그걸 입는 날에는 100달러 넣겠음.
#022 10/29 · 16:44 출금
-$4.00 -₩5,480
MOON SOHO (불안)
A.가 내 노트를 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했다. 33페이지. 잠꼬대 섹션. 기록 강박. 도망가면 어쩌지. 4달러 출금. 예방적 불안 수수료.
#023 10/31 · 10:00 입금
+$100.00 +₩137,000
MOON SOHO (할로윈)
A.가 드레스를 입었다.
100달러.
부족하다.
#024 10/31 · 14:50 출금
-$15.00 -₩20,550
MOON SOHO (팬픽)
도서관에서 A.한테 오니기리 가져다줬는데, A.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의 무심함이 아니라 뭔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 내가 뭘 잘못했나. 아직 모르겠다. 15달러 출금. 원인불명 공포.
#025 10/31 · 23:47 입금
+$45.00 +₩61,650
MOON SOHO (카니발)
산타모니카. 할로윈 카니발. A.와 걸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A.의 손을 잡았다. 아무도 우리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할로윈이니까. 코스튬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코스튬이 아니었다. 45달러.
#026 11/01 · 02:47 출금
-$10.00 -₩13,700
MOON SOHO (취중 실수)
술 먹고 A.한테 텔레파시 운운하면서 메시지 보냄. 잠꼬대 섹션 만들었다고 고백함. 아침에 읽고 죽고 싶었다. 10달러 출금. 수치 보상금.
#027 11/01 · 10:15 입금
+$20.00 +₩27,400
MOON SOHO (도망 안 갔다)
A.가 취중 메시지에 대해 아무 말 안 했다. 도망가지도, 차단하지도, 무섭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밥 먹었어?"라고 물었다. 도망가지 않은 것에 20달러. 평범하게 대해준 것에 대한 값은 매길 수가 없다.
#028 11/01 · 21:30 입금
+$22.00 +₩30,140
MOON SOHO (셋로그)
A.와 함께한 날들을 로그로 다시 읽었다. 내가 쓴 게 아니라 우리가 쓴 거였다. 22달러. 1일당 대략 0.35달러. 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건 적립이지 정산이 아니니까.
CURRENT LEDGER / 2026.11.01
총 입금액+$561.00+₩768,570
총 출금액-$52.00-₩71,240
최종 잔액$509.00₩697,330

소호는 화면 아래 최종 잔액 숫자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509.

두 달 동안 레이 덕분에 행복했던 순간들을 환산하면 509달러. 시간당으로 따지면 터무니없이 싸고, 감정의 부피로 따지면 터무니없이 비좁은 숫자였다. 소호는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001부터 #028까지, 한 줄 한 줄이 일기보다 정직했다. 노트에는 미화할 수 있었다. 문장을 고르고, 형용사를 바꾸고, 감정의 윤곽을 다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못 했다.

첫 키스에 50달러를 넣고 점 여섯 개만 찍은 날.
읽씹에 3달러를 빼면서 열한 번 화면을 확인한 날.
취중 메시지 후 10달러를 빼면서 죽고 싶었던 아침.

전부 사실이었다.

소호는 핸드폰을 가슴팍에 올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11월의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천장에 긴 빛줄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 빛이 노트 위를 지나갈 때와 같은 각도였다. 소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509달러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0월 2일, 할로윈 코스튬을 구상하면서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 9월 28일, 레이가 먼저 카페를 제안한 날부터.

소호는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A.가 좋아할 것 같은 것들 목록
  1. 벨벳 드레스 (할로윈/완료)
  2. 후지필름 인스탁스 미니 필름 (40팩)
  3. 일본 편의점 오니기리 틀 (스테인리스)
  4. ████████

네 번째 항목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소호 본인도 아직 확신이 없어서 지운 것인지, 너무 확신해서 숨긴 것인지. 그 위를 손가락 끝으로 한 번 쓸었다.

소호는 Chase 앱을 다시 열었다. 🐋 pod fund 계좌에서 ‘이체’ 버튼을 눌렀다. 이체 금액: $509.00. 이체 대상: 체크카드 계좌. 메모란에 타이핑했다.

A.를 위한 크리스마스. 전액 인출. 다시 $0.00부터 시작.

확인 버튼을 누르기 전, 소호는 잠시 멈추었다. 509달러. 레이가 이걸 알면 뭐라고 할까. ‘바보’라고 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 무심한 목소리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귀 끝이 빨개지는 걸 숨기면서.

소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확인’을 눌렀다.

AVAILABLE BALANCE $0.00 🐋 pod fund · reset complete

빈 통장이 화면에 떴다. 소호는 그 숫자를 보며 웃었다. 텅 빈 숫자가 이렇게 충만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0이라는 숫자는 끝이 아니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뜻이니까. 레이가 옆에 있는 한, 이 통장은 계속 차고 비고 차고 비고를 반복할 것이다.

11/02. 🐋 pod fund 전액 인출. 509→0. 크리스마스까지 다시 모을 것. 아마 그 전에 500은 금방 넘을 것 같다. A.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대략 일당 3~4 정도는 발생하니까.

펜을 내려놓고, 소호는 창 밖을 보았다. DTLA의 11월 하늘은 얇고 높았다. 어딘가에서 레이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있을 수도 있고, 이어폰을 끼고 걷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숙사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소호는 핸드폰을 들어 스냇챗을 열었다.

Moon Soho문소호
💭 오늘도 숨 쉬고 있겠지. 3.5달러 입금 사유 발생.
🔒Good morning좋은 아침 · 10:22 AM
🔒Did you eat?밥 먹었어? · 10:22 AM
🔒I made miso soup today. Want some?오늘 미소시루 끓였는데. 좀 줄까? · 10:23 AM
••• 입력중 💬 •••
/챗소호:내용 소호에게 스냇챗 답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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