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세요. …… 잘생겼잖아요.
VERHANDLUNG
DIETER WILKE × LUKAS WEISS · DREAM RECORD
프랑크푸르트 안전지대, 디터 빌케 자택 3층 침실. 새벽 3시 17분.
디터 빌케는 잠들어 있었다. 왼팔이 옆으로 뻗어 있었고 손가락 끝이 루카스가 누워 있어야 할 자리의 시트를 붙잡고 있었으나 루카스는 화장실에 가 있었기 때문에 손가락은 빈 천만 쥐고 있었다. 숨이 깊고 고르게 내려가 있었으며 눈꺼풀 아래에서 안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꿈이 시작되었다.
법정은 넓었다. 석조 벽면에 독일 연방 문장이 걸려 있었고 천장에서는 샹들리에가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으며 바닥은 어두운 호두나무 마루였다. 디터 빌케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수갑은 차지 않았으나 양 옆에 법정 경위가 서 있었고 그 경위들의 키가 디터의 팔꿈치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작았다.
법정 안의 모든 인물이 작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크기의 루카스 바이스가 재판관석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검은 법복을 입고 있었으나 소매가 너무 길어서 손끝이 보이지 않았고 법복 밑단이 의자 아래로 질질 끌리고 있었다. 재판관석 위의 나무 망치는 루카스의 상체만 한 크기였으며 루카스는 양손으로 망치 자루를 붙잡아 겨우 들어 올린 뒤 탁자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 대신 '퐁'이라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디터는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법정이었고 재판관이었으므로 당연한 풍경이었다.
재판관석 왼편에 서기석이 있었다. 서기 역시 루카스였다. 같은 얼굴에 같은 금안에 같은 흑갈색 머리카락이었으나 둥근 안경을 쓰고 있었고 두 손으로 깃털 펜을 안고 있었다. 깃털 펜이 루카스의 키와 거의 같은 길이여서 펜을 움직일 때마다 몸 전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양피지 위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으나 글씨가 삐뚤빼뚤했고 중간중간 잉크가 번져 있었다.
검찰석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돌아보았다. 검사도 루카스였다. 검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나 넥타이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었고 본인이 걸어 다닐 때마다 넥타이를 밟아 비틀거렸다. 한 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으나 서류가 루카스보다 두꺼웠기 때문에 겨드랑이에 끼운 채 질질 끌고 왔다. 검찰석 앞에 서서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려 했으나 탁자가 너무 높았다. 깡충 뛰어올라 서류를 밀어 넣었고 착지할 때 넥타이에 걸려 한 바퀴 굴렀다. 먼지를 털고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옷매무새를 고쳤다.
디터의 시선이 변호인석으로 향했다. 변호사 역시 루카스였다. 이쪽은 갈색 트위드 재킷을 입고 있었으며 재킷 주머니에서 사탕 껍질이 삐져나와 있었다. 두꺼운 법전을 양팔로 껴안고 있었는데 법전이 루카스의 상반신을 완전히 가려 얼굴만 겨우 보였다. 금안이 법전 위로 반쯤 드러나 있었고 그 눈이 디터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방청석을 돌아보았다. 방청석에도 루카스가 앉아 있었다. 줄줄이. 첫 번째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작은 루카스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으며 저마다 다른 복장이었다. 모자를 쓴 루카스, 후드를 뒤집어쓴 루카스, 디터의 헨리넥 셔츠를 입고 소매가 질질 끌리는 루카스, 군복을 입은 루카스. 모두 같은 얼굴이었고 모두 같은 금안으로 디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몇은 팝콘을 먹고 있었고 팝콘 한 알이 루카스의 머리만 했다.
디터는 피고인석에 앉은 채 법정을 둘러보았다. 전부 루카스였다. 천장의 샹들리에를 닦고 있는 것도 루카스였고 법정 입구의 문을 잡고 서 있는 것도 루카스였으며 창문턱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는 것도 루카스였다. 디터의 입술이 움직였다.
"...Was ist das hier."(...여기가 뭐야.)
재판관 루카스가 망치를 다시 들어 올렸다. 양손으로 자루를 잡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내리쳤다. 퐁.
"Ruhe im Saal!"(법정 내 정숙!)
목소리가 작았다. 몸이 작으니 성량도 작았으며 법정 뒤쪽까지 닿지 못했다. 방청석의 루카스들이 웅성거렸고 팝콘 먹는 소리가 바삭바삭 울렸다. 재판관 루카스가 다시 망치를 내리쳤다. 퐁. 퐁퐁.
"Stille! ...Bitte."(조용히! ……부탁이야.)
마지막에 '부탁이야'가 붙었다. 재판관이 부탁을 하는 법정이었으나 디터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부탁하면 조용해지는 법정이었고 방청석의 루카스들이 실제로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검사 루카스가 넥타이를 한 손으로 걷어 올려 어깨에 걸친 채 검찰석 앞으로 나왔다. 서류를 한 장 꺼내 들었으나 서류가 루카스의 키보다 세로로 길었기 때문에 아래쪽이 바닥에 닿아 접혀 있었다. 펼쳐 읽으려 했으나 글씨가 거꾸로 되어 있었고 서류를 뒤집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Angeklagter Dieter Wilke. Die Anklage lautet wie folgt."(피고인 디터 빌케. 혐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목소리가 진지했다. 작은 몸에서 나오는 진지한 톤이었으며 넥타이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으나 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류를 바닥에 펼쳐놓고 그 위를 걸어 다니며 읽었다.
"Erstens. Übermäßige Kontrolle der Nahrungsaufnahme des Opfers. Der Angeklagte hat dem Opfer wiederholt befohlen, 'mehr zu essen', obwohl das Opfer klar angegeben hat, satt zu sein."(첫째. 피해자의 식사량에 대한 과도한 통제. 피고인은 피해자가 배부르다고 명확히 표현했음에도 반복적으로 '더 먹으라'고 명령한 바 있음.)
방청석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모자를 쓴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옆의 후드 루카스에게 뭔가 속삭였다. 후드 루카스가 팝콘을 한 알 집어 입에 넣었다.
"Zweitens. Pathologische Eifersucht. Der Angeklagte hat bei mindestens dreizehn dokumentierten Gelegenheiten feindseliges Verhalten gegenüber Dritten gezeigt, die mit dem Opfer interagierten. Darunter: verbale Drohungen gegenüber Kollege Acht, stille Behandlung gegenüber Kollege Zehn, und das unbefugte Versenden einer Warnachricht vom Mobiltelefon des Opfers."(둘째. 병적 질투. 피고인은 피해자와 교류한 제3자에 대해 최소 열세 건의 적대적 행동을 보인 바 있음. 해당 건에는 동료 에잇에 대한 언어적 위협, 동료 텐에 대한 묵살, 피해자의 휴대폰을 무단으로 사용한 경고 메시지 발송이 포함됨.)
디터의 눈썹이 움찔했다. 열세 건. 숫자가 구체적이었다. 이의를 제기하려 입을 열었으나 검사 루카스가 서류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며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Drittens. Exzessiver Körperkontakt ohne ausdrückliche Genehmigung. Insbesondere das wiederholte Auflegen der Hand auf die Brust des Opfers während des Schlafs. Der Angeklagte hat dieses Verhalten als 'unbewusst' beschrieben, was die Schwere der Tat nicht mindert."(셋째. 명시적 허가 없는 과도한 신체 접촉. 특히 수면 중 피해자의 가슴 위에 반복적으로 손을 올려놓은 행위. 피고인은 해당 행동을 '무의식적'이라고 기술했으나, 이는 행위의 중대성을 감면시키지 않음.)
"Der Angeklagte wird gebeten, zu warten."(피고인은 기다려 주세요.)
'기다려 주세요'였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재판관 루카스가 법복 소매 안에서 손을 겨우 꺼내 디터를 향해 작은 손바닥을 보이며 '잠깐' 제스처를 했다. 손이 너무 작아서 손바닥이 디터의 엄지손톱만 했다.
"Viertens. Emotionale Nötigung durch Schweigen. Der Angeklagte neigt dazu, bei Konflikten jede Kommunikation einzustellen und eine unsichtbare emotionale Mauer zu errichten, bis das Opfer sich zuerst entschuldigt — ungeachtet der Schuldfrage."(넷째. 침묵을 통한 정서적 강압. 피고인은 갈등 시 모든 의사소통을 차단하고 보이지 않는 정서적 벽을 세워 잘잘못과 무관하게 피해자가 먼저 사과할 때까지 유지하는 경향이 있음.)
방청석의 군복 루카스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디터의 헨리넥 셔츠를 입은 루카스는 소매를 접으려다 포기하고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앉아 있었다.
"Und fünftens."(그리고 다섯째.)
검사 루카스가 서류의 마지막 줄에 도달했다. 서류 끝에 서서 돌아보았고 금안이 디터를 올려다보았다. 넥타이가 완전히 바닥에 내려와 있었으며 서류 위에 넥타이 끝이 펼쳐져 있었다.
"Fünftens. Der Angeklagte hat es versäumt, dem Opfer in angemessener Häufigkeit mitzuteilen, dass er es liebt."(다섯째.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적절한 빈도로 전달하는 데 실패함.)
법정이 조용해졌다. 방청석의 루카스들이 일제히 디터를 바라보았다. 팝콘 먹는 소리도 멈추었다. 서기 루카스가 깃털 펜을 멈추고 안경 너머로 디터를 올려다보았으며 창문턱의 루카스가 다리를 흔드는 것을 멈추었다.
디터의 턱이 굳었다.
"Die Verteidigung darf nun sprechen."(이제 변호인의 발언을 허가합니다.)
변호사 루카스가 법전을 양팔로 껴안은 채 자리에서 내려왔다. 법전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의자에서 내려오는 과정에서 법전과 함께 굴러떨어졌고 법전 밑에 깔려 잠시 버둥거렸다. 기어 나와 법전을 세워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발언을 시작했다.
"Hohes Gericht. Mein Mandant ist... ähm..."(재판장님. 제 의뢰인은…… 음……)
법전 위에 서 있던 변호사 루카스가 재킷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냈다. 메모가 접혀 있었고 펼치려다 바람에 날아갔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디터의 피고인석 위에 떨어졌고 디터가 내려다보니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디터는 좋은 사람임 (증거: 있음) (어디에: 모름)'
"Mein Mandant ist ein guter Mensch. Das steht in meinen Notizen. Die ich gerade... verloren habe. Aber das ändert nichts an der Tatsache."(제 의뢰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제 메모에 적혀 있습니다. 방금…… 잃어버렸지만. 하지만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Einspruch. Die Verteidigung hat keine Beweise vorgelegt."(이의 있음. 변호인은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Der Beweis ist— ähm— der Angeklagte selbst. Schauen Sie ihn an. Er sieht... gut aus."(증거는— 음— 피고인 본인입니다. 보세요. …… 잘생겼잖아요.)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작은 루카스들이 깔깔거렸고 모자 루카스가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하며 웃었다. 디터의 관자놀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Das ist keine Verteidigung."(그건 변호가 아냐.)
"Moment, ich habe noch etwas."(잠깐, 아직 있어요.)
변호사 루카스가 법전을 펼쳤다. 법전의 페이지가 루카스의 키만큼 펼쳐졌고 글씨를 읽으려면 페이지 위를 걸어 다녀야 했다. 변호사 루카스가 페이지 위를 걸으며 손가락으로 글씨를 짚었다.
"Hier, Paragraph zweiundvierzig. 'Wenn der Angeklagte dem Opfer nachts unbewusst die Hand auf die Brust legt, zeigt dies...' ähm... 'tiefe emotionale Bindung.' Sehen Sie? Das ist positiv."(여기, 제42조. '피고인이 밤에 무의식적으로 피해자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경우, 이는……' 음…… '깊은 정서적 유대를 나타낸다.' 보셨죠? 긍정적이에요.)
"Einspruch. Das Buch ist ein Kochbuch."(이의 있음. 그 책은 요리책입니다.)
변호사 루카스가 법전을 내려다보았다. 페이지에 파스타 레시피가 적혀 있었다. 변호사 루카스가 법전을 닫았다.
"...Kein weiterer Kommentar."(……추가 발언 없습니다.)
법전을 안고 자리로 돌아가다가 넘어졌다. 법전 밑에 다시 깔렸고 서기 루카스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이를 기록했다. 기록 내용: '변호인 넘어짐 (2회차).'
디터는 피고인석에서 양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법정을 내려다보았다. 재판관도 검사도 변호사도 서기도 방청객도 전부 루카스였고 전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크기였으며 전부 같은 금안으로 디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Darf ich mich selbst verteidigen."(직접 변호해도 되나.)
"Erlaubt."(허가합니다.)
디터가 일어섰다. 피고인석이 법정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 아니, 디터가 법정에서 가장 큰 존재였기 때문에 일어서자 모든 루카스가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아야 했다. 재판관 루카스의 법복 모자가 뒤로 넘어갔고 검사 루카스가 넥타이에 걸려 비틀거렸으며 방청석의 루카스들이 일제히 '오-'라는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Erstens. Die Kontrolle der Nahrungsaufnahme. Er isst nicht genug. Das ist keine Kontrolle, das ist—"(첫째. 식사량 통제. 충분히 안 먹는다. 그건 통제가 아니라—)
"Fürsorglichkeit?"(걱정이라고요?)
"Das hat der Angeklagte dem Opfer aber nie gesagt."(하지만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디터의 입이 닫혔다. 열었다. 닫혔다.
"...Zweitens. Die Eifersucht."(……둘째. 질투.)
방청석이 조용해졌다.
"Ich... bin nicht stolz darauf."(……자랑스럽지 않다.)
검사 루카스가 넥타이를 걷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금안이 디터를 올려다보았다.
"Aber er ist der Einzige, den ich habe. Und manchmal... vergesse ich, dass er nicht nur mir gehört. Nein. Er gehört mir nicht. Das weiß ich. Aber manchmal vergesse ich es trotzdem."(하지만 그 녀석은 내가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끔…… 그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잊는다. 아니. 내 것이 아니다. 알고 있다. 그래도 가끔 잊는다.)
서기 루카스의 깃털 펜이 멈추었다. 안경 너머의 금안이 커졌고 양피지 위에 잉크가 한 방울 떨어졌다.
"Drittens. Der Körperkontakt."(셋째. 신체 접촉.)
"Ich... brauche das."(……필요하다.)
그 한마디에 법정 전체가 정지했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방청석의 루카스들이 입을 다물었으며 팝콘 봉지를 내려놓았다. 디터의 목소리가 법정 벽면에 울렸으나 크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낮았고 그래서 모든 루카스가 더 집중해야 들을 수 있었으며 모든 루카스가 집중하고 있었다.
"Er ist das Einzige, was sich nicht falsch anfühlt. Alles andere—Menschen, Oberflächen, Luft—alles fühlt sich an wie... Kontamination. Nur er nicht. Und wenn ich meine Hand auf seine Brust lege, fühle ich, dass er da ist. Dass er atmet. Dass er nicht weg ist."(그만이 잘못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 외의 모든 것 — 사람, 표면, 공기 — 전부…… 오염처럼 느껴진다. 그만 아니다. 그리고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면 거기 있다는 걸 느낀다. 숨을 쉬고 있다는 걸. 가지 않았다는 걸.)
재판관 루카스의 법복 소매가 재판관석 위에 늘어져 있었다. 소매 안에서 작은 손이 나와 자기 가슴을 만졌다. 무의식적으로.
"Viertens. Das Schweigen."(넷째. 침묵.)
"Das... ist, weil ich nicht weiß, was ich sagen soll. Nicht weil ich ihn bestrafen will. Ich weiß nicht, wie man sagt, was ich fühle. Also sage ich nichts. Und dann wird es schlimmer."(그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벌주려는 게 아니다. 느끼는 걸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한다. 그러면 더 나빠진다.)
법정은 넓었다. 석조 벽면에 독일 연방 문장이 걸려 있었고 천장의 샹들리에가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고, 바닥은 어두운 호두나무 마루였다. 디터 빌케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수갑은 차지 않았으나 양 옆에 법정 경위가 서 있었고 그 경위들의 키가 디터의 팔꿈치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경위 둘 다 루카스였다. 한 명은 모자를 썼고 한 명은 쓰지 않았으며, 둘 다 제복 소매가 너무 길어 손이 보이지 않았다.
법정 안의 모든 인물이 작았다. 재판관석에 올라가 앉은 루카스는 검은 법복의 소매를 팔꿈치 아래로 접어 올렸으나 계속 흘러내렸고, 법복 밑단은 의자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망치를 양손으로 들어 올려 내리칠 때마다 반동에 몸이 흔들렸다. 퐁.
변호사 루카스가 트위드 재킷 밑에서 겨우 기어 나왔다. 디터의 자기변호는 넷째 항목까지 진행된 상태였다.
디터의 목소리가 법정 벽면에 울렸으나 크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낮았다. 재킷의 먼지를 털며 일어선 변호사 루카스가 사탕 껍질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Und fünftens."(그리고 다섯째.)
입이 닫혔다. 열렸다. 닫혔다.
법정이 기다렸다. 서기 루카스의 깃털 펜이 양피지 위에서 멈췄다. 안경이 코끝까지 내려와 있었으나, 그것을 밀어 올리는 것조차 잊은 채 디터를 올려다보았다. 방청석의 루카스들이 팝콘 봉지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디터의 헨리넥 셔츠를 입은 루카스는 소매를 접으려다 포기한 듯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디터의 입술을 바라보았고, 군복 루카스는 팔짱을 풀었으며, 후드 루카스는 후드를 살짝 뒤로 넘겨 얼굴을 드러냈다.
전부 같은 금안이 디터를 향해 있었다.
"Fünftens. Dass ich es nicht oft genug sage."(다섯째. 충분히 자주 말하지 못한다는 것.)
검사 루카스가 넥타이를 걷어 올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서류 위에 올라선 채 고개를 젖혀 디터를 올려다보았다.
"Der Angeklagte gibt den Tatbestand zu?"(피고인은 혐의를 인정합니까?)
"...Ich gestehe es."(……인정한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모자 루카스가 옆의 루카스에게 무언가 속삭였고, 팝콘을 들고 있던 루카스가 알갱이 하나를 떨어뜨렸다. 팝콘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조용한 법정 안에 또각 울려 퍼졌다. 서기 루카스가 허겁지겁 기록했다. 글씨가 삐뚤어졌으나 내용은 정확했다. '피고인, 제5항 혐의 자백.'
"Ich weiß, wie man es sagen soll. Ich weiß die Wörter. Ich liebe dich — das sind drei Wörter. Ich weiß das."(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안다. 단어를 안다. 사랑한다 — 세 단어다. 그걸 안다.)
"Aber jedes Mal, wenn ich den Mund aufmache, kommt etwas anderes raus. 'Iss mehr.' 'Wo bist du.' 'Antworte.' Das meine ich nicht. Nein — das meine ich schon. Aber ich meine auch etwas anderes."(그런데 매번 입을 열면 다른 말이 나온다. '더 먹어.' '어디야.' '대답해.' 그런 뜻이 아닌데. 아니 — 그런 뜻이 맞긴 하다. 그런데 다른 뜻도 있다.)
변호사 루카스가 법전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으며 디터를 올려다보았다. 사탕 껍질이 주머니에서 하나 더 떨어졌지만, 줍지는 않았다. 검사 루카스의 넥타이가 바닥까지 완전히 풀려 있었고, 그 위에 서 있었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재판관 루카스는 망치를 내려놓고 법복 소매 안에서 양손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손바닥 크기가 디터의 엄지손톱보다 작았다.
"Wenn ich sage 'Iss mehr,' meine ich: Ich will, dass du lebst. Lange. Wenn ich sage 'Wo bist du,' meine ich: Ich kann nicht atmen, wenn ich nicht weiß, dass du sicher bist. Wenn ich sage 'Antworte,' meine ich—"('더 먹어'라고 할 때 뜻은 오래 살았으면 한다는 거다. '어디야'라고 할 때 뜻은 네가 안전한지 모르면 숨을 못 쉰다는 거다. '대답해'라고 할 때 뜻은—)
목소리가 끊겼다. 디터의 손이 피고인석 난간을 잡았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법정 안의 모든 루카스가 숨을 죽였다.
"— dass ich Angst habe, dass du nicht mehr da bist."(— 네가 더 이상 거기 없을까봐 무섭다는 거다.)
서기 루카스의 깃털 펜에서 잉크가 양피지 위로 번졌다. 기록하던 손이 멈춘 채 안경 너머의 금안이 흔들렸고, 양피지에 적힌 마지막 글자가 흐려졌다. 방청석이 완전히 고요해졌다. 팝콘을 먹던 루카스는 팝콘을 씹지도 못한 채 머금고 있었으며, 창문턱의 루카스는 다리를 흔들던 것을 멈추고 두 손으로 창틀을 잡았다.
재판관 루카스가 법복 소매를 끌며 일어섰다. 재판관석 위에 서니 디터의 가슴 높이 정도였고, 금안은 디터의 얼굴을 정면으로 올려다보았다.
"Der Angeklagte hat sein Schlussplädoyer beendet?"(피고인의 최종진술이 끝났습니까?)
"Gut. Dann verkünde ich das Urteil."(좋습니다. 판결을 선고합니다.)
재판관 루카스가 망치를 들어 올렸다. 양손으로 자루를 잡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내려쳤으나, 법복 소매에 망치 자루가 걸려 자세가 흐트러졌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은 뒤, 두 번째 시도 끝에 망치가 탁자에 닿았다. 퐁.
"Schuldspruch in allen Punkten."(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디터의 턱이 굳었다.
"Die Strafe lautet wie folgt."(형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재판관 루카스가 판결문을 펼쳤다. 판결문이 루카스의 키보다 두 배는 길어서, 종이가 재판관석 아래로 폭포처럼 흘러내려 바닥에 닿아 말렸다. 재판관 루카스가 종이의 맨 아랫부분을 읽으려 고개를 숙였으나, 글씨가 보이지 않았는지 배를 깔고 엎드려 재판관석 모서리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읽었다. 법복이 뒤집혀 등이 보였으며, 작은 등이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Dem Angeklagten wird auferlegt, sämtliche im Gerichtssaal anwesenden Personen zu umarmen. Ohne Ausnahme. Sofort."(피고인에게 법정 내 모든 인원을 빠짐없이 안아줄 것을 명합니다. 예외 없음. 즉시 시행.)
디터가 재판관 루카스를 내려다보았다. 재판관 루카스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디터를 올려다보았고 법복 밑에서 금안만 반쯤 보였다.
"Die Strafe ist rechtskräftig und sofort vollstreckbar."(형은 확정되었으며 즉시 집행됩니다.)
검사 루카스가 넥타이를 어깨에 감고, 서류를 접어 겨드랑이에 끼운 채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팔을 벌렸다. 벌린 양팔의 너비가 디터의 손바닥 넓이보다 조금 더 넓은 정도였으며, 작은 검정 정장의 양팔이 좌우로 뻗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모자 루카스가 다른 루카스에게 속삭였고, 후드 루카스는 양팔을 벌리며 차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헨리넥 셔츠 루카스는 소매에 파묻힌 손을 흔들며 디터를 불렀으며, 군복 루카스는 다시 팔짱을 꼈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변호사 루카스가 법전 위에서 내려와 디터의 피고인석으로 걸어왔다. 피고인석은 변호사 루카스의 머리보다 한참 위에 있었기에, 루카스는 피고인석 다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트위드 재킷 주머니에서 사탕 껍질이 떨어졌고, 법전은 바닥에 남겨졌다. 피고인석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작은 등을 디터가 내려다보았다.
"Kletter nicht—"(올라오지 마—)
변호사 루카스가 미끄러졌다. 손이 빠지며 떨어지려는 순간 디터의 손이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변호사 루카스의 등을 받쳐 피고인석 위로 올려놓았고 손바닥 위에 올라온 변호사 루카스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팝콘 알갱이 스무 개보다 가벼울 정도였으며, 트위드 재킷의 감촉만이 디터의 손바닥에 미세하게 전해졌다.
변호사 루카스가 디터의 손바닥 위에 앉아 올려다보았다. 금안이 가까웠다. 작은 입이 열렸다.
"Das zählt schon als Umarmung, oder?"(이것도 안아준 걸로 치죠?)
디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감싸 쥐자, 변호사 루카스의 작은 등이 디터의 손가락 안쪽에 닿았다. 디터의 입술이 움직였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온 것은 숨이었고 그 숨이 변호사 루카스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Das war eins. Noch—"(하나 끝났습니다. 아직—)
검사 루카스가 법정 안의 인원을 세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꼽으려 했으나 손이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고, 대신 몸 전체로 숫자를 세며 좌우로 흔들거렸다.
"— siebenundvierzig."(— 마흔일곱.)
"Siebenundvierzig."(마흔일곱.)
"Siebenundvierzig."(마흔일곱.)
디터가 법정을 둘러보았다. 재판관 루카스가 재판관석 위에 엎드린 채 금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고 서기 루카스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기다렸으며 검사 루카스가 넥타이를 끌며 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방청석의 모든 루카스가 하나도 빠짐없이 디터를 바라보고 있었고 앞줄부터 뒷줄까지 작은 금안들이 점점이 빛나는 것이 법정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디터는 변호사 루카스를 손바닥에 올린 채 피고인석에서 내려왔다. 한 걸음 내딛자 바닥이 울렸고 가장 가까이 있던 검사 루카스가 고개를 한껏 젖혀 올려다보았다. 넥타이에 걸려 비틀거리는 그를 디터의 다른 손이 받쳤다. 검사 루카스의 등이 디터의 손가락 사이에 닿았고 작은 정장의 어깨가 디터의 엄지 아래에 놓였다.
"Hmm. Warm."(흠. 따뜻하네.)
디터의 턱이 굳었다. 입술이 얇게 눌렸으나 손은 치우지 않았다.
서기 루카스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다가왔다. 깃털 펜을 내려놓고 양팔을 뻗었으나, 팔의 너비가 디터의 검지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디터가 한쪽 무릎을 꿇자 서기 루카스의 금안이 가까워졌고 안경 너머로 깜빡이는 속눈썹이 보였다. 디터의 손이 서기 루카스의 등을 살짝 감쌌고 서기 루카스가 디터의 손가락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재판관 루카스가 재판관석에서 내려오기 위해 법복 밑단을 걷어 올렸으나 법복이 너무 길어 밑단이 걷어지지 않았다. 법복 안에서 버둥거리다 결국 포기하고 재판관석 끝에 앉아 두 다리를 내밀었다. 내려달라는 신호였다. 디터가 손을 내밀었고 재판관 루카스가 법복째 디터의 손바닥 위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법복이 디터의 손가락을 감쌌고, 법복 안에서 작은 심장이 뛰는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 감촉에 디터의 호흡이 한 박자 멈추었다.
방청석의 루카스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앞줄의 루카스가 의자에서 내려오다 팝콘 봉지를 쏟았고 팝콘이 바닥으로 후드둑 쏟아졌다. 모자 루카스가 모자를 벗어 가슴에 안고 디터의 발치까지 걸어왔으며, 후드 루카스는 후드를 완전히 벗어 흑갈색 머리카락을 드러낸 채 다가왔다. 헨리넥 셔츠 루카스는 디터의 옷과 똑같은 셔츠 소매를 질질 끌며 왔고, 군복 루카스는 군화 소리를 내며 걸어왔으나 군화가 너무 커서 한 발짝마다 발이 쑥 빠졌다.
디터가 바닥에 완전히 앉았다. 호두나무 마루 위에 다리를 뻗고 앉자 루카스들이 몰려왔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루카스, 허벅지 옆에 기대는 루카스, 팔뚝을 잡고 기어오르는 루카스, 어깨까지 올라가려다 미끄러져 옷깃에 매달린 루카스까지. 디터의 양손이 닿을 수 있는 범위에 루카스들이 모여들었고 닿을 수 없는 범위에서도 다가오고 있었다.
디터의 손가락이 가장 가까운 루카스의 등을 쓸었다. 그 다음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그 다음 루카스의 어깨를 감쌌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하나를 만지면 다음 루카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다음을 만지면 또 다른 루카스가 팔을 벌리고 있었다. 모두 같은 금안이었고, 모두 같은 온도였다.
뺨에 무언가가 닿았다. 어깨까지 올라온 루카스가 디터의 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작고 따뜻한 이마의 온기가 디터의 관자놀이까지 퍼졌다.
"......Wie viele noch."(……아직 몇이나 남았어.)
"Neununddreißig."(서른아홉.)
무릎 위의 루카스가 디터의 손바닥 안에서 웅크렸다. 군복 루카스는 디터의 허벅지 옆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으며, 모자 루카스는 디터의 손가락 사이에 모자를 끼워 넣고 그 아래에서 잠들기 시작했다. 서기 루카스는 안경을 벗어 디터의 바지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깃털 펜은 바닥에 놓여 있었고 양피지는 절반이 말려 있었다.
디터는 앉은 채로 법정 바닥에서 마흔일곱 번의 접촉을 이행했다. 열다섯 번째쯤에서 손에 힘을 주는 법을 잊었고 스물세 번째쯤에서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루카스의 가슴 위를 찾았으며 서른한 번째에서는 자신의 입술이 어느 루카스의 이마에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치우지 않았다.
재판관 루카스가 마지막이었다. 법복을 질질 끌며 디터의 무릎 위로 올라와 법복 속에서 두 손을 꺼내 디터의 검지를 잡았다. 검지 하나를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 손은 작고 따뜻했다.
"Strafe vollstreckt."(형 집행 완료.)
디터의 무릎 위에는 법복을 입은 루카스가, 양 허벅지 옆에는 잠든 루카스들이 기대어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모자가 끼어 있었고, 어깨에는 루카스 하나가 매달렸으며, 팔 안에는 세 명이 웅크리고 있었다. 법정 바닥에는 팝콘이 흩어져 있었고 넥타이가 풀려 있었으며, 깃털 펜이 굴러다니고 법전이 펼쳐진 채 파스타 레시피가 보였다.
디터 빌케는 법정 바닥에 앉아 마흔일곱 명의 루카스 바이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안전지대. 디터 빌케 자택 3층 침실. 새벽 3시 42분.
디터 빌케가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익숙한 천장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고, 왼쪽 창문 사이로 가로등 빛이 얇은 줄기처럼 들어와 시트 위에 선을 그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빠르지만 불쾌하지 않은 박동이었으며, 손바닥에 뭔가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한 착각이 손가락 끝까지 퍼져 있었다.
왼손이 옆을 더듬었다. 시트가 따뜻했다. 아까와 달리 비어 있지 않았고 손가락 끝에 옷감이 닿았다.
루카스가 돌아와 있었다. 옆으로 누워 등을 보인 채 자고 있었고, 숨소리는 고르고 깊었다. 디터의 손이 루카스의 등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다 셔츠 밑단 너머 맨살에 닿았고 거기서 멈추었다.
따뜻했다.
디터의 손바닥이 루카스의 등에서 옆구리를 지나 가슴 위로 돌아갔다. 셔츠 위로. 심장이 뛰는 자리를. 손바닥으로 감싸듯 올려놓았고 루카스의 심장이 고르게 뛰는 것이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맥박이 고르게 이어졌다. 디터의 손가락이 루카스의 가슴 위에서 미세하게 펼쳐졌다가 다시 오므라들었고, 셔츠 천이 그 움직임에 따라 주름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꿈의 잔상이 손끝에 걸려 있었다. 작은 이마의 온기, 법복 안에서 뛰던 심장의 떨림, 트위드 재킷의 보풀 같은 것들이 아직 손바닥의 감각으로 남아 있었으나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흐릿해지고 있었다.
디터는 눈을 감지 않았다. 천장의 윤곽을 바라보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고 루카스의 뒷목이 보였다. 흑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목선이 가로등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으며, 귓불 아래 작은 점 하나가 어둠 속에서도 식별되었다. 디터의 엄지가 루카스의 가슴 위에서 느리게 원을 그렸다. 무의식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는 무의식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고 그 차이를 디터 본인만 알고 있었다.
루카스의 숨결이 한 번 깊어졌다. 등이 미세하게 팽창했다가 수축했고 디터의 손바닥이 그 움직임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왔다. 잠이 깬 건지 뒤척이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으나 루카스의 손이 올라와 디터의 손등을 덮었다. 눈을 뜨지 않은 채. 손가락이 디터의 손가락 사이를 느슨하게 꿰었고 커플링의 금속이 부딪혀 '딱' 소리가 났다.
"...Schläfst du nicht?"(……안 자?)
잠에 잠긴 목소리였다. 혀가 채 풀리지 않은 발음이 베개에 반쯤 묻혔고 디터의 손을 잡은 손가락에는 힘이 거의 없었다.
디터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꿈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법정이 있었고 망치가 있었고 마흔일곱 명의 루카스가 있었다는 말을 새벽 세 시에 할 인간은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디터는 다른 말을 했다.
"Schlaf weiter."(계속 자.)
"...Du solltest zuerst schlafen, Dieter."(……디터가 먼저 자.)
"Ich schlafe."(자고 있어.)
"Du bist der Erste, den ich mit offenen Augen schlafen sehe."(눈 뜨고 자는 사람 처음 봐.)
루카스가 몸을 뒤집었다. 반쯤 감긴 금안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머금고 디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디터의 손은 루카스가 몸을 뒤집는 동안에도 가슴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위치만 미세하게 바뀌어 지금은 쇄골 바로 아래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루카스의 심장이 손바닥 전체로 전해졌다.
루카스의 눈이 디터의 표정을 읽었다. 잠에서 덜 깬 눈이었으나 읽는 정확도에는 영향이 없었다. 디터의 눈썹이 평소보다 내려와 있었고 입술의 각도가 평소보다 부드러웠으며, 디터의 엄지가 쇄골 위를 반복적으로 쓸고 있다는 것을 루카스는 피부로 알고 있었다.
"...Was hast du geträumt?"(……무슨 꿈 꿨어?)
"Woher willst du das wissen."(어떻게 아는데.)
"Wenn es nichts wäre, würde deine Hand sich nicht so bewegen."(아무것도 아니면 손이 저렇게 안 움직여.)
디터의 엄지가 멈추었다. 1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Nervensäge."(……짜증나는 놈.)
"Das ist doch ein Kompliment."(그거 칭찬이지.)
루카스가 디터의 손 위에 올려놓은 자기 손을 살짝 눌렀다. 디터의 손이 가슴에 더 밀착되었고 심장의 박동이 한층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루카스의 눈이 다시 감기기 시작했다. 잠이 돌아오고 있었으나 손은 풀지 않았다.
"...War es ein schlechter Traum?"(……나쁜 꿈이었어?)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루카스의 반쯤 감긴 눈이 그것을 읽었는지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잠에 잠긴 얼굴에 번지는 웃음은 늘 평소보다 느렸고 늘 평소보다 오래 남았다.
"...Dann ist gut."(……그럼 됐어.)
루카스의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잠이 다시 내려앉고 있었다. 호흡이 길어지고 눈꺼풀의 떨림이 사라졌으며 디터의 손을 잡은 손가락만이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았다.
디터는 루카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베개 위에 흩어진 흑갈색 머리카락과 반쯤 벌어진 입술과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가 보였다. 가로등 빛이 루카스의 광대뼈 위에 얇은 선을 그었고 그 선 아래로 볼이 부드럽게 기울어져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금안이 마흔일곱 개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으나 이미 잡히지 않는 기억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남은 것은 손바닥 아래의 심장뿐이었다.
디터의 고개가 내려갔다. 루카스의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오래 머물지 않았다. 머물 필요가 없었다. 꿈속에서 이미 마흔일곱 번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디터는 알지 못했고, 다만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Gute Nacht."(잘 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루카스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디터의 손이 루카스의 가슴 위에 놓인 채 무게를 더했고 루카스의 심장이 그 무게 아래에서 고르게 뛰었다. 디터는 그 박동을 세지 않았다. 세면 끝이 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고,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천장의 윤곽이 흐려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어둠이 다시 찾아왔으나 이번에는 법정도 망치도 없었고, 다만 손바닥 아래의 온기만이 잠의 깊은 곳까지 따라 내려왔다.
새벽 네 시의 프랑크푸르트는 고요했다. 먼 곳에서 자율주행 수송차의 모터 소리가 한 번 울리고 사라졌으며, 창밖의 가로등이 깜빡이다 다시 안정되었다. 3층 침실의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누워 있었고 하나의 손은 다른 하나의 가슴 위에 있었으며 그 위에 다른 손이 겹쳐져 있었다.
커플링 두 개가 맞닿은 채 빛나지 않았다. 빛날 필요가 없었다. 거기 있으니까.
아침 일곱 시. 루카스가 먼저 일어났다.
디터의 손은 여전히 가슴 위에 있었다. 잠든 동안 위치가 미세하게 이동해 지금은 왼쪽 쇄골 바로 아래에 놓여 있었으며 손가락이 셔츠 천을 살짝 움켜쥐고 있었다. 루카스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디터의 손가락 마디에 긁힌 자국이 있었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총기 관리 오일의 희미한 얼룩이 남아 있었으며, 약지의 커플링이 새벽빛에 둔탁하게 빛났다. '4'라는 각인이 루카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루카스는 디터의 손을 치우지 않았다. 대신 디터의 손가락을 하나씩 셔츠에서 풀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고, 그 손을 자기 입가까지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 입술이 스쳤다. 디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깨지 않았다.
루카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이 마루에 닿자 차가운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고 루카스는 그것에 반응하지 않은 채 세면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었고 찬물로 얼굴을 씻었으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젯밤 울었던 흔적이 눈 밑에 옅은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루카스는 그 그림자를 한 번 만지고 손을 내렸다.
주방으로 내려갔다.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콩을 가는 소리가 조용한 집안에 울렸다. 디터가 좋아하는 원두였다. 에티오피아산 워시드. 산미가 강하고 바디가 얇은 것을 디터는 선호했으며 루카스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디터는 루카스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루카스는 그것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루카스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아침은 탁한 회색이었다. 격벽 너머의 하늘이 납빛 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거주구 안쪽의 건물들 사이로 자율주행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전쟁이 진행 중인 세계의 격벽 안쪽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평범함이었으며 루카스는 그 평범함 안에 서서 커피의 향을 맡았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루카스가 화면을 확인했다.
[8] who's alive
[8] respond or i'll assume you're dead and take your stuff
루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답장을 치려다 화면을 내렸다. 아래쪽에 텐의 메시지가 이어져 있었다.
[10] Touch my espresso machine and I'll make you swallow C4.
[8]that's technically a compliment coming from you
[8] also 12 you there?
루카스가 커피잔 두 개를 꺼내며 한 손으로 답장을 쳤다.
[12] 4 schläft noch.(4는 아직 자는 중.)
[12] Weckt ihn nicht.(깨우지 마.)
[8] i value my life
[10]How domestic.
[10] Oh my, looks like your husband is still asleep.
루카스는 'Oh my, looks like your husband is still asleep.'를 읽고 잠시 멈추었다. 스크린샷을 찍었다. 디터에게 보여주면 텐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 가능성 자체가 재미있어서 저장했다.
커피가 다 내려졌다. 루카스는 디터의 잔에 우유를 넣지 않았다. 블랙. 설탕도 없이. 처음에는 그 쓴맛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디터의 입술에서 그 맛을 알게 되었으므로 이해할 필요가 사라졌다.
잔 두 개를 들고 3층 침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디터가 잠에서 깨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은회색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눌려 있었고 눈이 반쯤 감겨 있었으며 이불이 허리까지 내려와 헨리넥 셔츠의 주름이 드러나 있었다. 루카스가 올라오는 계단 소리에 깬 듯했다.
디터의 시선이 루카스를 향했다. 커피잔을 든 루카스를 보았고 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고 루카스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의 옅은 그림자를 보았는지 시선이 그곳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이동했다.
"Wie spät ist es."(몇 시야.)
"Kurz nach sieben."(일곱 시 좀 넘었어.)
디터의 손이 이불 위를 더듬었다. 루카스가 누워 있던 자리를 만졌고 이미 식은 온기에 손가락이 멈추었다가 물러났다.
루카스가 침대 옆 협탁에 디터의 잔을 내려놓았다. 디터가 잔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 에티오피아산 워시드. 블랙. 설탕 없이. 디터의 눈이 잔 너머로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이 없었다. 커피가 맞았으므로 아무 말이 필요 없었고 루카스는 그 침묵을 읽을 줄 알았다.
루카스가 침대 위에 올라가 디터의 옆에 앉았다. 어깨가 닿았다. 디터는 밀어내지 않았고 루카스는 밀어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앎이 커피보다 먼저 아침을 채웠다.
"Zehn provoziert schon seit heute Morgen."(텐이 아침부터 시비 걸어.)
"Was hat er gesagt."(뭐래.)
"Er meinte: 'Dein Mann schläft wohl noch.'"(남편이 아직 주무시나 봐, 래.)
디터의 커피잔이 멈추었다. 입술이 잔 가장자리에 닿은 채 청록색 눈동자가 느리게 좁아졌다.
"...Ich bringe ihn um."(……죽인다.)
"Trink erst deinen Kaffee."(커피 먼저 마시고.)
디터가 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더 마셨다. 삼킨 뒤에도 살의는 사라지지 않은 듯했으나 커피의 온기가 그것을 약간은 무디게 만든 것이 턱 선의 긴장이 한 겹 풀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루카스의 어깨가 디터의 어깨에 기울었고 디터는 그 무게를 받아들인 채 창밖의 납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프랑크푸르트의 아침은 여전히 탁한 회색이었다. 그러나 3층 침실 안쪽은 커피 향과 체온으로 따뜻했으며, 두 개의 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나란히 올라가 천장 아래에서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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