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at 11:05 ♡
| AT&T | 11:04 AM | 100% ▮ |
| Messages | 雨宮 怜 reply fast | Contact |
11월의 세 번째 목요일. 구름이 낮게 깔린 DTLA의 하늘 아래 소호는 메인 광장 벤치에 앉아 다음 수업까지 남은 40분을 소화하고 있었다. 무릎 위에 펼친 몰스킨 노트의 여백에 날씨를 적다가 — 주머니 속 폰이 울렸다.
소호의 엄지가 멈췄다. 4.75. 숫자 하나. 맥락 없음. 앞뒤 문장 없음. 이모지도 없음. 그냥 — 4.75.
소호의 첫 반응은 미소였다. 레이가 먼저 연락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반응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세 번째 반응은 답장.
읽음 표시가 떴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소호는 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5분을 기다렸다. 10분을 기다렸다. 레이는 읽고 씹었다. 소호는 노트 여백에 '4.75'를 적었다. 물음표를 붙였다. 볼펜 끝을 입술에 대고 생각했다. 좌표? 성적? 환율? pH 수치?
11시 23분.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소호의 눈이 커졌다. 또 숫자. 이번엔 12.50. 아까보다 큼. 소호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
읽음 표시. 1분 뒤.
그리고 침묵.
소호는 'No'를 세 번 읽었다. 좌표가 아니다. 그러면 뭔데. 소호의 손가락이 노트 위를 두드렸다. '4.75 → 12.50'. 숫자를 나란히 적고 밑줄을 그었다. 패턴을 찾으려 했다. 4.75 × 2 = 9.50, 아님. 4.75 + 12.50 = 17.25, 뭔가의 합계? 아니면 비율? 소호는 계산기 앱을 열었다가 닫았다. 열었다가 닫았다.
점심시간이 지났다. 소호는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으며 폰을 확인했다. 12시 41분.
소호의 샌드위치가 입 안에서 멈췄다.
읽음 표시. 3분.
'hmm.' 소호는 폰을 내려놓았다. 올려다봤다. 내려놓았다.
'hmm'이 뭐야.
짜증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 짜증과 애정이 동시에 발화한 상태. 레이의 'hmm'은 '설명할 생각이 있긴 한데 굳이 지금은 아닌' 뉘앙스와 '알아서 맞혀봐' 뉘앙스의 중간 어딘가에 있었고, 소호는 그 뉘앙스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미칠 것 같았다.
오후 수업 중. 소호는 교수의 미국 현대시 강의를 듣다 말고 폰을 확인했다.
세 개가 연달아 와 있었다.
소호의 노트에는 강의 내용 대신 숫자들이 세로로 나열되어 있었다.
12.50
6.25
2.99
38.00
7.50
소호는 이 숫자들을 전부 더했다. 71.99. 이 숫자에 의미가 있나. 없나. 소호는 각 숫자 옆에 가능한 해석을 적기 시작했다. 4.75 = 커피값? 12.50 = 점심? 6.25 = ??? 2.99 = 스티커? 38.00 = 옷? 7.50 = ???
손이 멈췄다.
금액이잖아.
소호는 교수가 칠판에 적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 구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폰을 들었다. 숫자들을 다시 훑었다. 4.75. 커피 한 잔 가격대. 12.50. 샌드위치와 음료 세트. 6.25. 뭔가 소소한 것. 2.99. 다이소 가격대. 38.00. 옷이나 잡화. 7.50.
레이가 쓴 돈.
소호는 강의실에서 폰을 두 손으로 잡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두 개가 더 왔다.
소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기고 강의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답장을 보냈다.
읽음 표시. 즉시.
소호는 복도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뒤에서 오던 학생이 부딪힐 뻔했다. 소호는 사과도 잊고 폰을 들여다보았다.
읽음 표시. 20초.
소호의 입이 벌어졌다.
레이의 답은 그게 전부였다. 'you reply fast.' 답장 빨라서. 그게 이유. 메모장 대신 소호에게 보낸 이유가 — 답장이 빨라서.
소호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 위에 폰을 올려놓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숫자들이 시간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레이의 하루가 숫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4.75 — 아침 커피. 12.50 — 점심. 6.25 — 아마 필름 현상액. 2.99 — 다이소에서 뭔가. 38.00 — 옷이거나 잡화. 7.50 — 사진 관련 소모품. 15.99 — 턱시도샘 폰케이스 가격대. 3.25 — 자판기 음료.
소호는 노트를 꺼냈다. 빈 페이지에 숫자들을 다시 옮겨 적었다. 시간, 금액, 추정 품목. 세 열로 정리했다. 합계선을 그었다. $91.23.
소호는 그 합계를 둥글게 원으로 감쌌다.
레이의 하루가 91달러 23센트였다.
누군가의 하루를 숫자로 읽는 건 처음이었다. 레이가 언제 커피를 마셨는지, 언제 점심을 먹었는지, 언제 뭔가를 충동구매했는지 — 시간 간격까지 전부 보였다. 오전 11시 4분에 첫 커피를 마셨으니 늦게 일어난 거고, 12시 41분과 1시 17분 사이에 두 건을 연달아 결제했으니 점심 먹고 바로 어딘가를 들른 거고, 오후 1시 52분의 38달러는 — 뭘 산 거지. 소호는 38이라는 숫자 옆에 물음표를 세 개 찍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기가 레이의 지출 내역으로 하루를 역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소호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복도 바닥에 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리놀륨이 엉덩이를 식혔다. 웃음이 났다. 한숨 섞인, 이마를 짚는 종류의 웃음.
소호가 레이의 숫자 메시지 정체를 파악함
오후 5시. 소호는 카페테리아 앞 벤치에서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에게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보낸 메시지에 'ok'가 왔다. ok. 언제나 그렇듯 소문자, 마침표 없음, 이모지 없음. 그 두 글자가 소호에게는 연애편지보다 귀했다.
바람이 불었다. 11월 셋째 주의 LA는 해가 일찍 기울었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고, 카페테리아 유리문 너머로 학생들이 오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소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 레이의 걸음 소리를 기다렸다.
운동화가 콘크리트를 밟는 소리. 가볍고 짧은 보폭. 소호의 귀가 먼저 잡았다.
레이가 카페테리아 모퉁이를 돌아왔다. 검은 항공점퍼에 슬랙스. 카메라 가방이 왼쪽 어깨에 걸려 있었고, 지퍼에 매달린 턱시도샘 키링 두 개가 걸을 때마다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오른손에는 폰이 들려 있었다.
소호가 일어섰다.
소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정하고 낮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눈 안쪽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숫자를 받으며 쌓인 것 — 궁금증이 아니라, 레이의 하루를 숫자로 지켜본 사람 특유의 먹먹함 같은 것.
레이가 벤치 옆에 섰다. 소호보다 머리 하나 작은 키. 올려다보지 않았다.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소호가 먼저 걸었다. 카페테리아 안으로. 레이가 뒤따랐다. 트레이를 하나씩 들고 줄을 섰다. 소호는 치킨 시저 샐러드와 수프를 골랐고, 레이가 고르는 동안 기다렸다. 레이가 카츠카레를 집었다.
계산대 앞에서 소호가 지갑을 꺼냈다. 레이가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 소호가 손을 뻗어 레이의 손목을 — 잡지 않았다. 잡으려다가 멈췄다. 대신 말했다.
레이의 오드아이가 소호를 올려다보았다. 3초. 카드를 내렸다.
계산이 끝나고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소호는 수프 뚜껑을 열며 — 아주 자연스러운 어조로 — 말했다.
소호가 수프에 스푼을 담그며 레이를 보았다. 웃고 있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 있었지만, 그 안에 장난기와 걱정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레이의 스푼이 카레 위에서 멈췄다.
소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삼키고. 스푼을 내려놓고.
소호가 웃음을 참다가 결국 터뜨렸다. 낮은 목소리로, 어깨가 흔들리는 웃음.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갈색 눈이 젖어 반짝였다.
소호가 가방에서 몰스킨 노트를 꺼냈다. 펼쳤다. 오늘 날짜 페이지에 레이의 숫자들이 세 열로 정리되어 있었다. 시간. 금액. 추정 품목. 합계선. $91.23을 둥글게 감싼 원. 옆에 물음표 세 개.
소호가 노트를 돌려 레이에게 보여주었다. 깔끔한 필체. 분류된 데이터. 추정 품목란에는 '커피?', '점심?', '필름 현상?', '다이소?', '???', '자판기?'가 적혀 있었다. 38달러 옆에만 물음표가 유독 많았다.
소호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호기심이었다. 레이의 하루 중 가장 큰 금액. 소호의 눈이 레이의 오드아이를 잡았다. 펭귄 두 마리가 달린 카메라 가방이 레이의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고, 소호의 시선이 잠깐 그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카페테리아의 형광등이 차가운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창밖으로 캠퍼스 가로등이 주황빛 원을 만들었다. 소호는 수프를 한 입 더 떠먹고, 스푼을 접시 가장자리에 올려놓았다. 노트를 닫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두었다.
- 이전글최악이 좋아 26.09.05
- 다음글コンビニうどんはごはんじゃない! 26.09.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