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이···
말 랑 이 ♡
발단은 텐이었다.
W\.W. 본부 요새 섹터 E 공용 방. 오후의 무료함이 콘크리트 벽 사이를 느리게 채우고 있던 시간대에, 텐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다가 뜬금없이 소리를 질렀다.
화면을 들이민 곳에는 말랑이 스쿼시라는 물건이 있었다. 실리콘으로 만든 둥글고 무른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찌그러졌다 복원되는 단순한 장난감. 고양이 모양, 곰 모양, 토끼 모양, 음식 모양. 색색의 말랑한 덩어리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텐은 곰 모양 스쿼시를 손가락 두 개로 꾹 누르는 영상을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디터는 관심이 없었다.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작전 보고서를 읽고 있던 디터의 시선이 태블릿 화면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으며, 미간에 주름 하나가 생겼다 사라졌다. 쓸모없는 물건에 대한 쓸모없는 반응이라고 치부하고 보고서로 돌아갔다.
문제는 그 뒤에 발생했다.
루카스가 공용 방에 들어온 시각은 보고서를 두 페이지 더 넘긴 뒤였다. 흑갈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흐트러진 채 문을 열고 들어온 루카스는 손에 음료를 들고 있었고 디터의 옆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언제나처럼 가볍고 자연스러운 동선이었다. 디터는 고개를 들지 않았으나 루카스가 앉는 기척만으로 위치를 인지했고, 보고서를 읽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한 박자 느려졌다.
루카스가 텐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텐이 태블릿을 다시 들이밀며 말랑이 스쿼시에 대한 열변을 이어갔고, 루카스가 그것을 보며 무언가 짧게 대답했다.
디터는 듣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보고서 위에 고정되어 있던 청록색 눈동자가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루카스의 옆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텐의 태블릿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각도. 그 각도에서 루카스의 볼이 보였다.
디터의 시선이 멈추었다.
창백한 피부 위로 형광등의 무미건조한 빛이 내려앉아 있었고 고개를 기울인 탓에 한쪽 볼의 윤곽이 부드럽게 올라와 있었다. 작고 섬세한 얼굴의 곡선을 따라 볼살이 미세하게 밀려 올라가 있는 형태가, 방금 전 화면에서 본 실리콘 덩어리의 둥글고 무른 표면과 겹쳤다.
디터의 손가락이 보고서 위에서 멈추었다.
‘아니야.’
고개를 돌려 보고서로 시선을 되돌렸다. 같은 문장을 세 번째 읽고 있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서 루카스가 텐에게 뭐라고 말하며 웃었고 그 웃음에 볼살이 한 번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옆에 있으니까.
보고서를 덮었다.
디터의 손이 움직인 것은 의지라기보다 반사에 가까웠다.
왼손이 올라왔다. 보고서를 쥐고 있던 손이 아니라 빈 손이. 루카스의 턱을 잡지 않았고 어깨를 돌리지도 않았으며, 다만 손가락 끝이 루카스의 왼쪽 볼에 닿았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이 볼살 위에 가볍게 얹혔다가 아주 천천히 눌렀다.
살이 손가락 아래로 밀려들어갔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뼈가 없는 부분이라 누른 만큼 들어갔고, 손가락을 떼면 복원될 형태. 실리콘이 아니라 체온이 있는 피부였으며 그 아래로 미세한 맥박이 느껴졌다.
디터의 입이 열렸다.
한국어였다. 발음이 약간 딱딱했으나 분명히 '말랑이'라고 발화했다. 루카스가 간간이 쓰는 한국어 단어들이 디터의 어휘에 침투해온 결과였고 이 순간 독일어도 영어도 아닌 그 세 음절이 가장 정확한 묘사였다.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누르고 느린 속도로 놓았다가 다시 눌렀다. 볼살이 밀려들어갔다 차오르기를 반복했고 디터의 청록색 눈동자는 그 미세한 변형을 빠짐없이 추적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무릎 위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텐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디터의 눈이 텐을 향해 돌아갔다. 날카로운 일별이었으나 손가락은 루카스의 볼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디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손이 여전히 루카스의 볼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귓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결벽증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 피부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항복한 손가락들이 자발적으로 볼살의 탄력을 탐닉하고 있었고 디터의 이성은 그것을 중단시키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다.
독일어로 중얼거렸다. 루카스에게 한 말인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인지 구분되지 않는 음량이었다. 손가락이 볼에서 턱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다시 볼살로 돌아왔다. 엄지가 합류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볼살을 아주 가볍게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질문이 아니었다. 감탄에 가까운 독백이었으며 디터 본인도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반쯤 인지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루카스의 볼살은 누르면 들어가고 놓으면 돌아왔다. 그 단순한 물리 현상이 디터의 전두엽을 정지시키고 있었다.
텐이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카메라 방향이 두 사람을 향했고 디터가 그것을 눈치채기 전에 셔터음이 한 번 울렸다.
디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으나 루카스의 볼에서 손을 떼야 했고 그 찰나의 망설임이 텐에게 도주할 시간을 주었다. 텐이 태블릿을 안고 공용 방 문 밖으로 사라졌으며 복도에서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디터는 빈 문을 노려보았다. 손가락 끝에 루카스의 볼살 감촉이 남아 있었고 귓불의 붉은 기가 목까지 내려와 있었다.
늘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실행에 옮기지 않을 말이었다. 디터는 다시 루카스를 보았다. 볼에 자기 손가락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그 얼굴을.
손이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천천히. 양 볼을 양손으로 감싸듯 잡아 살짝 모았다. 루카스의 입이 물고기처럼 오므라드는 형태가 되었고 디터의 표정이 무너졌다. 무표정이 깨지고 입꼬리가 경련하듯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으나 참는 쪽이 지고 있었다.
두 번째. 이번에는 아까보다 발음이 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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