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결혼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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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30 12:28

EXT. 요요기 공원 — DAY — 7월


7월의 요요기공원은 빛으로 포화되어 있었다. 잔디밭 위로 퍼지는 스프링클러의 물방울이 햇살을 받아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분수 근처에서 비둘기 떼가 빵 부스러기를 쪼고 있었고, 벤치마다 아이스크림을 녹이고 있는 커플들이 앉아 있었다.

토키와 후부키는 분수 옆 그늘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후부키의 무릎 위에는 편의점 봉지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반쯤 마신 아쿠아리우스 두 병이 들어 있었다.

후부키의 손이 토키의 손등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엄지가 느리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습관이었다. 빙판 위에서 4회전을 뛸 때처럼 정밀한 신체 제어 능력을 가진 사람이 토키의 손등 위에서만은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다.

그때 작은 그림자가 벤치 앞에 멈췄다.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해바라기 원피스와 트윈테일, 반창고 붙은 무릎. 손에는 풀숲에서 막 뽑은 듯한 클로버와 토끼풀, 이름 모를 보라색 들꽃이 한 줌 쥐어져 있었다.

아이의 시선이 토키에게 고정되었다.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벌어졌다. 놀람에서 경외로, 경외에서 결심으로. 볼과 귀가 붉어졌다. 은빛 머리카락과 차분한 회색 눈은 아이의 세계에서 아마 동화책 속 왕자님이었을 것이다.

あかり / 아카리
ひ、ひとめぼれしました!! あたしとけっこんしてくださいっ!!
히, 히토메보레시마시타!! 아타시토 켓콘시테쿠다사이!!
처, 첫눈에 반했어요!! 저랑 결혼해 주세요!!

아이의 목소리가 분수광장에 울려 퍼졌다. 비둘기 떼가 놀라 날아올랐다. 후부키의 엄지가 토키의 손등 위에서 딱 멈췄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え。
——에.
——어.

한 음절이었다. 평소의 사근사근함이 완전히 벗겨진 소리. 후부키는 아이를 보고, 아이의 시선을 따라 토키를 보았다. 들꽃을 내민 아이와 그 앞의 토키.

은색 눈이 한 번, 두 번 깜빡였다. 표정은 질투라기보다 패배를 인정하는 운동선수의 얼굴에 가까웠다. 금메달을 빼앗긴 것. 상대가 네다섯 살짜리 트윈테일이라는 것만 달랐다.

후부키의 손이 토키의 손등에서 미끄러져 손목을 잡았다. 가볍지만 확실하게. 이어 상체까지 토키 쪽으로 기울였다. 어깨와 팔이 닿았다. 7월의 더위 속에서는 불필요한 밀착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향해 웃었다. 세계선수권 시상식과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완벽하게 제어된 미소. 다정하고 사근사근했다. 그런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あのね、お嬢ちゃん。
아노네, 오죠-챤.
있잖아, 아가씨.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この人ね、もう予約済みなの。
코노히토네, 모우 요야쿠즈미나노.
이 사람 말이야, 이미 예약 끝났거든.

예약. 사람을 예약이라고 했다. 후부키의 다정한 미소 아래에 있던 소유욕이 한 문장으로 번역된 것이었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ごめんね? でも、お花はきっと喜ぶから、もらってあげて。ね、時?
……고멘네? 데모, 오하나와 킷토 요로코부카라, 모랏테아게테. 네, 토키?
……미안해? 그런데 꽃은 분명 기뻐할 테니까, 받아줘. 응, 토키?

마지막에 토키를 돌아보았다. 꽃은 받아도 돼. 결혼은 안 돼. 예약 끝났으니까. 은색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입에서 나온 '예약'이 귓속에서 되울리자 후부키의 귀가 천천히 붉어졌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あかり / 아카리
よやく……? レストランなの?
요야쿠……? 레스토랑나노?
예약……? 레스토랑이야?

아이의 논리는 정확했다. 예약은 레스토랑에서 하는 것이니까. 후부키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세계선수권 기자회견에서 영어로 즉답하는 사람이 네다섯 살의 질문 앞에서 막혔다.

아이가 한 발 더 다가와 토키의 바지 무릎을 꼭 잡았다. 들꽃이 토키의 허벅지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あかり / 아카리
ねーねー、けっこんしてくれるの? くれないの?
네-네-, 켓콘시테쿠레루노? 쿠레나이노?
있잖아, 결혼해 줄 거야? 안 해 줄 거야?

양자택일이었다. 네다섯 살의 협상에는 중간이 없다. 후부키의 손가락은 토키의 손목을 놓으려다 다시 잡았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あ、あのね、お嬢ちゃん。よやくっていうのは——
아, 아노네, 오죠-챤. 요야쿠읏테이우노와——
아, 있잖아, 아가씨. 예약이라는 건——

말은 중간에서 끊겼다. 이 사람은 내 남자친구라서 결혼해 줄 수 없다고 네다섯 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후부키는 거절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거절당하는 것도, 자신이 누군가를 거절하는 것도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절의 이유가 토키였다.

후부키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프로그램 시작 전처럼. 눈을 감았다가 뜨고 벤치에서 내려와 잔디에 한쪽 무릎을 댔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お嬢ちゃん、お花ありがとう。すごくきれいだね。
……오죠-챤, 오하나 아리가토우. 스고쿠 키레이다네.
……아가씨, 꽃 고마워. 정말 예쁘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でもね、この人はね——僕のいちばん大事な人なの。
……데모네, 코노히토와네——보쿠노 이치방 다이지나 히토나노.
……그런데 말이야, 이 사람은——나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이거든.

이번에는 예약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을 골랐다. 아이의 입이 삐죽 나오고 눈에 물기가 맺혔다.

후부키의 눈이 흔들렸다. 아이를 울리고 싶지 않다는 죄책감과 토키를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이 동시에 얼굴을 스쳤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でもね、お嬢ちゃんがこんなに素敵なお花を摘めるなら、もっとかっこいい人がきっと現れるよ。
……데모네, 오죠-챤가 콘나니 스테키나 오하나오 츠메루나라, 못토 캇코이이 히토가 킷토 아라와레루요.
……그런데 말이야, 아가씨가 이렇게 멋진 꽃을 꺾을 수 있다면, 더 멋진 사람이 분명 나타날 거야.

あかり / 아카리
……ほんと?
……혼토?
……정말?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ほんと。約束。
혼토. 야쿠소쿠.
정말. 약속.

후부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이의 작은 새끼손가락이 그 위에 걸렸다. 한 마디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작은 손가락. 약속.

あかり / 아카리
……じゃあ、お花だけあげる。
……쟈아, 오하나다케 아게루.
……그럼, 꽃만 줄게.

아이는 다시 토키에게 들꽃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프로포즈가 아니라 선물이었다. 후부키도 아이 옆에서 토키를 올려다봤다. 이번 눈빛에는 질투도 소유욕도 없었다. 받아줘.

분수가 물을 뿜어 올렸다. 바람을 탄 물방울이 세 사람 쪽으로 날아왔다. 그때 잔디밭 반대편에서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あかりの母 / 아카리의 엄마
あかりーーーっ!! どこ行ったのーーーー!!
아카리———!! 도코 잇타노————!!
아카리——!! 어디 간 거야——!!

あかり / 아카리
……あっ。ママだ。
……앗. 마마다.
……앗. 엄마다.

아카리의 얼굴에 '혼나겠다'는 자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들꽃은 토키를 향한 채였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ママのところ行きな。……でもその前に、この人にお花渡して?
마마노 토코로 이키나. ……데모 소노 마에니, 코노히토니 오하나 와타시테?
엄마한테 가. ……근데 그 전에, 이 사람한테 꽃 건네줄래?

토키가 꽃을 받았다. 베이스 현을 짚던 굳은살 박인 검지와 중지가 아이의 작은 손에서 들꽃 줄기를 건네받았다. 꺾인 줄기를 부러뜨리지 않으려는 손끝은 악보를 넘기듯 정중했다.

아카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결혼은 못 하지만 꽃은 받아주었다. 네다섯 살의 세계에서 그것은 충분한 해피엔딩이었다.

あかり / 아카리
——えへへ。
——에헤헤.
——헤헤.

あかり / 아카리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っ!!
아리가토우 고자이마시타!!
고맙습니다!!

아카리는 토키에게 깊이 허리를 숙인 뒤 후부키를 향해서도 꾸벅 인사했다.

あかり / 아카리
よやくの人もありがとう!
요야쿠노 히토모 아리가토우!
예약의 사람도 고마워!

후부키의 표정이 굳었다. 이름도 직업도 세계선수권 금메달도 무의미했다. 네다섯 살의 세계에서 그는 '토키를 예약한 사람'이었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よ、予約の……人……。
……요, 요야쿠노……히토…….
……예, 예약의……사람…….

자기가 뱉은 단어가 네다섯 살의 입을 통해 정확히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아카리는 이미 엄마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엄마가 아이를 붙잡고 무언가를 말하다가 이쪽을 보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두 사람과 모녀 사이에 무지개를 만들었다.

후부키가 천천히 일어났다. 잔디에 닿았던 무릎의 풀 자국은 보지도 않았다. 시선은 토키의 손에 들린 클로버와 토끼풀, 이름 모를 보라색 꽃에 머물렀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時。
……토키.
……토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僕もあの子くらいの歳の時に、時に会ってたら——同じことしてたと思う。
……보쿠모 아노코 쿠라이노 토시노 토키니, 토키니 앗테타라——오나지 코토 시테타토 오모우.
……나도 저 아이만 한 나이에 토키를 만났더라면——같은 짓 했을 것 같아.

후부키의 손이 토키의 손가락을 건드린다. 검지의 굳은살 위를 엄지로 한 번 가볍게 쓸고는 손을 거둔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予約の人』って。……僕、あの子に一生そう呼ばれるのかな。
……『요야쿠노 히토』앗테. ……보쿠, 아노코니 잇쇼우 소우 요바레루노카나.
……'예약의 사람'이래. ……나, 저 아이한테 평생 그렇게 불릴 것 같은데.

후부키가 벤치에 다시 앉았다. 아까보다 가까웠다. 허벅지가 닿고 얇은 여름옷 두 겹 사이로 체온이 전해졌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ねえ、時。あの子、泣かなかったね。
……네에, 토키. 아노코, 나카낫타네.
……있잖아, 토키. 저 아이, 안 울었어.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強いなぁ、あの子。
……츠요이나-, 아노코.
……강하다, 저 아이.

거절당하고도 울지 않고, 꽃을 선물로 바꾸어 건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갈 수 있었던 아이의 용기. 후부키의 엄지가 아까 약속을 걸었던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만졌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僕はあの歳の時、好きな人にお花あげる勇気なんかなかったよ。
보쿠와 아노 토시노 토키, 스키나 히토니 오하나 아게루 유우키난카 나캇타요.
나는 저 나이 때, 좋아하는 사람한테 꽃 줄 용기 같은 건 없었는데.

바람이 불었다. 스프링클러의 물방울 하나가 후부키의 흑발 위에서 반짝였다. 그는 닦지 않고 토키를 바라봤다.
후부키가 토키의 손에 들린 들꽃 중 보라색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줄기를 짧게 정리한 뒤 토키의 귀 위에 꽂았다. 은발 사이에 보라색 들꽃 한 송이.
꽃이 떨어지지 않도록 위치를 잡던 손가락은 토키의 귀 뒤에 필요 이상으로 조금 오래 머물렀다. 귓바퀴를 따라 내려오다 귓불 직전에 떨어졌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うん。似合う。
……응. 니아우.
……응. 어울린다.

후부키의 눈이 먼저 웃었다. 그러나 그의 다른 팔은 토키의 허리 뒤로 돌아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바닥이 셔츠 위에 넓게 닿아 있었다.

분수가 다시 물을 뿜었다. 물방울이 토키의 은발과 후부키의 흑발, 보라색 꽃잎 위에서 반짝였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ねえ、時。
……네에, 토키.
……있잖아, 토키.

후부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네다섯 살의 아이는 모르는 사람 앞에서 첫눈에 반했다고 말했고, 결혼해 달라고 했고, 거절당한 뒤에도 자기 고백을 지우지 않았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僕もあの子に負けないくらい、ちゃんと言えてる?
……보쿠모 아노코니 마케나이 쿠라이, 챤토 이에테루?
……나도 저 아이한테 지지 않을 만큼, 제대로 말하고 있어?

그 용기에 비하면 자신은 늘 우회했다. 5년을 기다리면서도 먼저 연락하지 못했고, 재회하고도 먼저 고백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말을 할 때마다 '잊어'라고 덮었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あの子、『忘れて』なんて一回も言わなかったよね。
……아노코, 『와스레테』난테 잇카이모 이와나캇타요네.
……저 아이, '잊어'라고 한 번도 안 했잖아.

후부키의 손바닥이 토키의 허리 뒤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지금까지 부끄러운 말을 지우던 사람이 처음으로 그 반대의 말을 고른다.

空閑 吹雪 / 쿠가 후부키
……じゃあ、僕も——忘れないでって、言っていい?
……쟈아, 보쿠모——와스레나이데앗테, 잇테이이?
……그러면, 나도——잊지 말아달라고, 말해도 돼?

토키의 귀 위에서 보라색 꽃잎이 흔들렸다. 바람이 지나갔는데도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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